categorized under 허허실실 & written by 쉐부랑코
캠퍼스를 벗어나 있다 보니 내가 캠퍼스에 몸담았었던 2년이란 짧은 시간을 자주 돌이켜 보게 된다. 내가 2년 동안 대학에 와서 한 게 뭐가 있을까, 난 어떠한 위치에 있는 학생이었나 등등. 어제 복귀하는 길에 서점에 들려 우석훈의 신간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를 집어 들었고 이제 막 50페이지 가량을 읽었다. 프롤로그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절망하는 존재'와 '절망적인 존재'란 표현이 그것이다.
해당 표현이 포함된 문단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 한국 대학생을 딱 두 부류로 나눈다면, '절망하는 존재'와 절망도 하지 않는 '절망적인 존재'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절망하는 존재'들은 그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미래가 지금 절망적이어서 이해가 된다.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절망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다. 그러나 절망도 하지 않는다면, 상황 인식 능력이 지나치게 떨어진, 그야말로 '절망적인' 존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대학생들이 이렇게 절망도 하지 않는 절망적인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도 대부분 무엇이 문제인지는 안다. 다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가 지금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뿐이다.
대학에 입학한 직후만 해도 혹은 입학하기도 전에 학부대학 내의 특정 공동체에 소속되면서 선배를 만나고 대학생활의 일면을 들여 볼 때만 해도 '절망'은 없었다. 입시라는 긴 터널을 뚫고 당도한 곳에 절망이란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신세계였고 흡사 유토피아 같았다. 놀고 싶으면 놀고 소리 지르고 싶으면 지르고 머리도 마음대로 길렀다. 술집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심지어 신촌이란 공간에서는 술 먹고 깽판 치는 게 그리 낯선 풍경도 아니었다. '연세대학교'라는 이름만으로도 누구나 날 환영해 주었고, 새내기라는 지위로부터 오는 일종의 권력도 마음껏 누릴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입시 지옥에서 억눌려 있던 나에게 캠퍼스는 절망이 비집고 들어올 틈바구니가 없는, 그야말로 자유의 공간이었다.
그 때에는 각자 나름대로 절망을 체감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선배들조차 절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나와 같은 새내기들도 누구나 자유의 공간에서 마음껏 활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무렵 내가 사귀기 시작한 선배들은 학점? 아웃오브 안중, 스펙? 이건 게임 아이템인가? 수업? 포도알처럼 쏙쏙 빼먹었다. 술집? 이건 그냥 '집', 캠퍼스 앞 잔디밭? 여기도 술집. 아마도 입시를 치르면서 한껏 억눌려 있던 나에게는 그런 게 자유 같아 보였다. 성적 고민 없이 놀아 제끼는 자유. 선배들에게 이쁨 받으려면 술자리 꼬박꼬박 나가고, 나가서 잘 마시고, 그러다가 꽐라 돼서 목소리 크게 떠들고 그러면 됐다. 특히 술 진창 먹고 객기 한 번 부리면 '스타'가 됐다.
그러던 것이 한 학기가 지나니까 좀 달라졌다. 사실 달라진 게 아니라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도 보이기 시작한 거다. 학점이 한 번 나오고 그에 따라서 각자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까 다 똑같이 자유의 공간에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사실상 캠퍼스는 내가 상상하던 자유의 공간이 아니란 걸 알았다. 학기 초에 모두가 같이 어울려 놀 때만 해도 다들 학점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대학에 온 뒤 첫 학기 학점을 보고 누군가는 만족했고, 누군가는 좀 불만족스러웠고, 누군가는 아예 절망했으며 또 누군가는 무신경했다. 만족한 쪽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론 학점이 잘 나온 부류, 다른 하나는 역설적으로 잘 안나온 부류. 학점 낮은 걸 자랑처럼 떠드는 풍습(?) 같은 게 있었다. 학고라도 맞으면 역시 또 '스타'가 됐다. 선배들은 이번 새내기들은 학점들이 너무 좋다고 했고, 학고 맞는 사람이 적어서 안되겠다는 소리들도 했다. 불만족스러워 한 건 역시 학점 관리 하려고 열심히 했는데 생각보다 학점이 낮게 나온 부류, 절망한 부류는 그보다 더 낮게 나온 부류다. 무신경한 부류는 애초에 학점은 아웃오브 안중인 부류. 학고라고 만족해하는 부류에서 좀 완화된 부류다.
이러고 보니까 학기 초에는 다 똑같이 술 퍼먹고 놀면서 학교 다닐 줄 알았던 동기들 중에도 다른 애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같이 술 먹고 스타됐던 애가 학점 탑에 올랐다. 그들 중 대부분은 역시 여학생이었고 ─ 학기 초 술자리의 마초적인 분위기에서 여학생들이 먼저 이탈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 그들은 방학을 맞이하여 영어 학원을 다녔다.
나는 어떤 부류였냐면 무신경한 부류였다. 난 학기 초 선배들에게서 물려 받은 학점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다소 완화해서 내면화했었다. 학점을 완전히 망치는 건 안되고, 그렇다고 학점에 목 메지도 않는 중간보다 조금 못한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처럼 서로 다른 부류는 좀 더 양극화 되어서 나에게 보였다. 그걸 우석훈 표현대로 '절망하는 존재'와 '절망적인 존재'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절망하는 존재도, 절망적인 존재도 나름 쿨했다. 절망하는 존재는 절망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버티려고,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고 꿈틀거렸다. 학점 관리하고, 스펙 쌓고 영어 학원 다녔다. 절망적인 존재는 진짜로 쿨하게 포기했다. 이들도 처음엔 절망했을지 모른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버티려고 꿈틀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국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경쟁하기를 포기한 게다. 학점이 뭐냐, 스펙이 뭐냐. 지금 당장 죽겠으니 놀고 보자.
그들 중에는 90년대 학번들로부터 그러한 태도를 물려 받은 사람도 많았을 거다. 잘은 몰라도 90년대 학번들 ─ 내지는 2000년대 초반 학번들까지 ─ 은 아마 지금보다 취업 걱정 덜 했고, 그래서 학점에도 덜 목 메고 스펙 쌓는 데에도 더 무신경 했을 거다. 연세대학교라는 타이틀만 있으면 어느 정도는 먹고 들어가던 시대에 학교를 다녔을 거고, 무엇보다 재수강 제한이 전혀 없던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다. 학점 빵꾸 나면 3, 4학년 되어서 재수강으로 땜빵할 수 있었을 때 말이다. 내가 새내기 때 만났던 선배들 ─ 주로 05, 04, 03학번 ─ 은 자신들이 새내기였을 때 그런 90년대 학번들의 태도를 배웠을 테니, 딱히 절망적인 현실에서 경쟁하기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차라리 그들은 애초에는 90년대 학번들처럼 그렇게 살아도 경쟁이 될 거라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그렇게 살면 이 절망적이 현실에서 도대체 경쟁이 되지 않는 세상이 이제 왔다. 어쩌면 세상은 원래 그랬는데 그들이 몰랐을 수도 있다. 우석훈처럼 20대의 절망적 현실을 콕 찝어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슬슬 청년실업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88만원 세대 담론이 등장하면서 모두가 절망적인 현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들도 '절망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거다. 학점 관리 안해도 경쟁이 될 줄 알았던 그들은 세상이 변하자 갑자기 '루저'가 됐다. 과거의 사고방식으로는 더이상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으니. 다시 시작하기에도 벅찼다. 그러니까 우석훈 말대로 무엇이 문제인지는 깨달았음에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 자포자기 하는 심정을 갖게 됐을 거다.
처음엔 불안하고 두려웠을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그들은 현실에 냉소하게 됐을 거다. 학점? X까고 있네. 대학생활은 자유롭게 술 먹으면서 하는 거야, 하면서. 절망적인 존재들이다. 절망적인 현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 현실 속에서 뒤쳐지고 있는.
나는 주로 그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정글에서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각자의 생존 법칙을 찾아 가는 것처럼 한 학기가 지나자 나도 뭔가 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처음엔 나도 현실에 무감각해서 1, 2학년 때는 진창 놀고 3, 4학년 가서 좀 열심히 하면 살 길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주위에는 훨씬 더 예민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동기들이 있었다. 그들은 방학 하기가 무섭게 계절학기 등록하고, 혹은 학원 등록하고 술 자리 적절히 골라가면서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그리고 나는 현실을 직접 대면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실에 예민한 그들을 바라봄으로써 현실을 인식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 편으로는 숨 막히는 일상에 묻혀 살면서까지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고 욕심도 많았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학점과 스펙에 매달리는 '절망하는 학생'들과 그 반대편에서 이들을 냉소적으로 바라 보며 자포자기한 '절망적인 학생'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버렸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경쟁에서 뒤쳐지기도 싫고, 경쟁 속에 뛰어드는 것도 싫었다. 적당히 학점 신경은 쓰면서도 영어 점수 관리나 스펙 쌓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그렇다고 신나게 놀지도 않았다.
한 편, 이렇게 절망적 현실을 두고 나타난 분화의 결과는 공동체의 붕괴였다. 경쟁력 강화에 나선 이들은 공동체 속에서 부대낄 시간에 자기계발에 치중하면서 공동체와 멀어져 갔고, 남아 있는 이들은 그처럼 냉정한 이들을 정이 없는 애들이라고 조소하며 공동체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 누군가는 간절히 공동체를 원하면서도 마초적인 문화에 지쳐 결국 공동체를 떠나기도 했다.
결국 대학 사회는 모두가 지는 게임을 하게 된 건 아닐까? 정글에서 살아 남기 위해 자기계발에 나선 이들은 그들대로 숨 쉴 틈 없는 일상에 치여 산다. 그 반대편에서 정글의 게임에 지친 이들은 자연스레 경쟁에서 도태되고, 그 양 진영의 가운데에는 나처럼 이도 저고 아니면서 뚜렷한 대안도 없이 부유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은 모두가 절망적인 존재들이다. 절망적인 현실을 예민하게 캐치하여 그 현실 속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 치여 사는 삶도 절망적이고, 경쟁에서 뒤쳐지면서 침전하는 삶도 절망적이며, 그 사이에서 경쟁력을 쌓지도 못하고 맘 편히 하고 싶은 일 하지도 못하는 삶도 절망적이다.
현실이 절망적인데 그 속에서 절망적이지 않은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사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우석훈은 책의 프롤로그에서 당사자 운동을 주장한다. 20대 문제는 20대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점은 20대들이 귀를 닫고 냉소로 가득차 있는 까닭도 크다. 그들은 20대가 문제가 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 주변의 말에 냉소만을 보낸다. 그래서 20대의 문제는 20대들이 목소리를 낼 때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이야기에 자신이 귀를 닫을 수는 없는 까닭이다.
'허허실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Happy Christmas (2) | 2009/12/25 |
|---|---|
| 여러가지 (8) | 2009/12/21 |
| 대학생활 2년 간의 포지셔닝 : '절망하는 학생'과 '절망적인 학생'의 사이에서 (5) | 2009/12/21 |
| 건빵들의 딴따라질 - 제 3화 : 낭만에 대하여 - (10) | 2009/12/16 |
| 2010년엔 뭘 할까 (8) | 2009/12/11 |
| 음악 플레이 싸이트 (6) | 2009/12/07 |
그런데 절망하거나, 절망적이거나 하는 분류가 나오게 된 것이 먼저는 스펙쌓기에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을 수 있는 중간지대가 거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절망해야 하고, 거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제 구실 못하는 사회인으로 치부받는 현실?
그것에 대한 대안과 희망이 필요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그것만 좇아 나갈 수 있는 것일까요,
현실에 부딪히려고 하지 않고 대안을 외치면 그 역시 도피자로 치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음, 그리고 다른 얘기지만
대안은 결국 사회 전반적인 구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듭니다. 우리에겐 어떤 대안이 있는 걸까요?
그리고 제가 이런 분류를 따라 본 것은 '위너'와 '루저'를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지막에 결국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이라고 했습니다. '위너'와 '루저'를 나누는 것은 오히려 고질적인 사회의 잣대이지요. 사회는 그러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위너'가 될 수 있다고 외치지만 사실은 모두가 '루저'가 돼 버리는 현실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불안감을 놓아 버리지 않는다면 당사자 운동은 불가능할 거란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다만 불안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가를 볼 수 있어야겠지요. 학점과 스펙 경쟁에 뛰어 들어서 사회가 말하는 '위너'가 되어도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아야겠지요.
성냥 / 중간지대가 없다는 게 맞지. 절망하지도 않고 절망적이지도 않은 학생이 없지. 혹은 사회가 그들이 살아 남을 틈바구니를 용납하지 않지. 그래도 대안은 그 사이에 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겠지. 절망하는 존재와 절망적인 존재 사이, 거기를 꿰뚫을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나는 스스로 절망하는 존재와 절망적인 존재 사이에 있다고 밝혔는데 사실은 어느 정도 절망하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는 절망적이기도 한 것 같애.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둘 다에 걸쳐 있던 게지.
어쩌면 절망하는 존재들이 나서야 할지도 몰라. 그들이야말로 절망적인 현실 자체를 가장 예리하게 캐치해내는 존재니까.
가장 어려운 건 역시 '어떻게'지. 어떻게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갈 거냐, 하는 거. 그걸 답하면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









